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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자료수집

임진왜란 이후의 동아시아

언어별 명칭
한국어
 임진왜란(), 정유재란()
 임진조국전쟁()
중국어
일본어
조선출병(), 분로쿠(문록)·게이초(경장)의 역(文禄·慶長の役)
영어
Japanese invasions of Korea
포르투갈어
La Guerra Imjin: La invasión de Corea

 

 

전쟁이 미친 영향

국가
부정적
긍정적
조선 국가 재정 파탄, 기록 소실, 백성(납치 및 사망), 기술자유출, 명 파병 명분 불교 강세, 실학자 
국가 재정(만력제 내탕금 포함), 국방력 약화, 멸망 파병 요청 명분
여진 - 명, 조선의 경계 약화, 건국(금, 청)
일본(도요토미) 병력 손실, 지배력 약화 기술자, 노예 확충
일본(도쿠가와) - 지배력 강화, 에도막부, 무역로 강화
일본(쓰시마) 조선 조정에 대한 일시적 분노 무역로 복구, 조선통신사
류큐 사쓰마 침공 가능성 확대 및 침공 -
포르투갈 - 무역로 확장
몽골 - -

 

조선

조선이 전쟁에서 간접적으로나마 얻은 점이 없지는 않았다. 공명첩 남발 때문에 신분제가 흔들렸다는 점 뿐이다. 이는 이후 청나라와 무역이 진행하며 실학자가 힘을 얻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일본과 다시금 교역이 진행되었는데, 승병이 진행에 개입하면서 불교의 입지가 조금 더 높아졌다.

 

물론 피해는 훨씬 컸다. 경작지가 1/5로 줄었고(150만결->30만결), 소수의 기술공을 포함하여 약 5만으로 추정되는 백성이 일본에 끌려갔다. 후에 돌아오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노비가 되었다. 게다가 많은 유물과 기록이 사라졌고, 왕실의 재정도 파탄났다. 때문에 승전국이지만 빈곤함을 핑계로 명에게 보답을 미룰 수 있었만 결과적으로는 군사외교의 약점이 되었다.

< 사르후 전투: 은혜(는)갚은 조선. 출처: 중앙일보>

 

만력제가 대체 왜. 무슨 이유로 임진왜란을 적극적으로 도왔는지 자세한 기록은 없는 듯 하다. 다만 만력제 즉위 전에 몽골과 화의는 맺었지만(1570) 경술의 변(1550)도 있었고, 임진왜란과 같은 해에 먼저 일어났던 보바이의 난도 있었기에 군사력을 자랑하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혈기왕성한 나이잖은가.

다만 당시 만력제는 사비까지 털어가며 국가재정을 낭비했고, 그 공백을 광세(鑛稅) 등의 세금으로 충당코자 하였으며, 이는 결국 민란 발발의 사유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재정관리 부실이 국방력 약화와 침략에 의한 멸망으로까지 이어진다.

< 명말 농민봉기 경로. 출처: 아틀라스 >

 

여진

임진왜란은 조선과 명의 주의력과 힘을 분산시켰다. 결과적으로 건주여진의 누르하지가 세력을 모아 부족들을 통합하고 건국을 이룩하는데 비교적 수월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임진왜란이 없었어도 이후 청나라가 명나라를 밀어냈을 수 있지만, 임진왜란이 가속화했을 수 있지않을까? 

< 명청교체기. 출처: 나무위키>

 

 

일본

결과적으로 임진왜란의 최대 수혜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이다. 만약 도요테미 히데요시가 병사하지 않았더라도 병력 손실이 워낙 컸기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었을 확율이 높다. 심지어 전국시대에 비해 무역도 활성화되어 경제적, 문화적으로도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류큐

임진왜란 전부터 왜구에 불만이 많은 나라였다. 때문인지 임진왜란 이전부터 사쓰마번을 통해 강요되었던 참전요청(물자지원)에 반대했다. 17세기초 에도막부 휘하에도 건재했던 사쓰마번은 결국 류큐를 침공했다.

< 사쓰마의 류큐 침공로. 출처: 아틀라스 >

 

 

 

 

참고: 나무위키. 임진왜란

참고: Rubén Serrano Villamor(2017). La Guerra Imjin: La invasión de Corea. HRM ediciones.

참고: 김준우(2023). 임진왜란이 300년 뒤에 세계사에 미친 엄청난 영향은? 사피엔스 스튜디오.

참고: 김현민(2019). 임진왜란 그후. 아틀라스.

참고: 윤태옥(2020). 명·조선 연합군 피 물든 사르후전투, 누르하치 ‘굴기’의 발판. 중앙SUN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