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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동아시아의 종교 - 유교(儒敎)

유교(儒敎)

중국의 춘추전국 시절부터 발생한 종교적 체계이자 동아시아의 철학.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정의를 찾아내고 설파한다. 다만 유교에서의 관계는 수평한 관계보다 수직 관계에 대한 주제를 다룬다. 해당 종교(학문)에는 주요 인물로 공자(), 맹자(孟子), 순자(荀子), 주자(朱子)가 있다.

 

 

공자는 인(仁)을 강조했다. 타인을 아끼고 배려하라고 했다.

 

맹자는 의(義)로써 본인이 떳떳하면 마음이 흔들릴 일이 없다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라고 했다. 

 

순자는 예(禮)로서 욕망을 길들이라고 했다.

 

주자는 기존 이론들을 정리해 성리학 체계를 성립했다.

 

 

 

 

국가별 유교

국가 시작 또는 주요 특징 16세기 특징 비고
중국 발상지이며 꾸준히 유교 버전을 업데이트함.
정치체제로 인해 21세기는 거의 많이 사라짐.
명청시대의 관학은 성리학이었다.  
대만 원주민들에 유교 문화 수입은 17세기. -  
조선 조선 건설과 함께 국가이념으로 성리학 채택.
현재까지 유교의 윤리적 관념이 남아있음.
사림파 집권이 분열되며 이기론이 발달.  
베트남 학파 구분이 옅고 개방적이다. 명나라의 침공/격퇴 이후 전파가 가속화됨.  
류큐 17세기부터 유교가 국가이념으로 사용 되었다. -  
일본 6세기 백제에서 전파 임진왜란 후 유교체계 확립.  

 

 

중국

유교 학파를 등장 순으로 나열하면 선진유학, 훈고학, 성리학, 양명락, 고증학, 공양학, 현대 신유학.

춘추시대에 시작해서 청나라 18세기 중반까지 많은 영향력을 끼쳤으나 청 후기 공양학이 등장할 쯤 위태로워진다. 서양의 산업혁명 여파로 점점 흔들리던 유교사상은 마침내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파괴되었다.

 

 

대만

청나라에 복속되지 못한 한족들은 동녕왕국에 흡수되었다. 동녕왕국을 세운 정성공은 원주민들에게 한족 유교 문화와 농사와 수렵 기술 등을 전파하며 교역관계를 만들었다. 과정에서 원주민들과의 갈등으로 사록사 전투라는 이름의 마찰도 있었다.

< 17세기 초반의 타이완 섬. 출처: 나무위키 >

 

조선

조선이 건국되면서 왕권 강화와 통치를 위해 성리학을 선택했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기존 불교를 제어했지만 뿌리뽑는 정도는 아니었다.

성리학은 관학파(훈구파), 사림파로 갈라지도 이후 사림파는 다시 동인 서인으로 나뉘게 된다.

< 성리학의 학통. 출처: 여강이씨향단파 >

이런 분열과 별도로 임진왜란 이후부터 양명학 도입시도가 있었으나 이황의 비판으로 물건너간다.

 

성리학은 17세기 이후로도 노론 안에서 호론(충청)과 낙론(경기)이 나뉘어 호락논쟁을 벌였다. 물(物)에 리가 있는냐 없느냐를 다룬 논댕이었는데, 당시 오랑캐는 사람취급 안 해주고 물로 다뤘기에 '오랑캐의 문화를 받아들여도 옳은 행동이냐'로 이어졌다.

결과는 호론이 대세가 되었고 이후 위정척사파의 뿌리가 되었다.

 

조선말기는 안동 김씨 세가에서 고증학을 밀어주며 18,19세기까지 유행했다. 다만 실학자들은 고증학이 현실개혁에 큰 도움이 없다고 봤기에 일부는 고증학의 문제점을 보완하고자 하였다.

 

19세기 이후에는 천주교 확산이 있었고 갑오개혁을 기점으로, 급격한 쇠퇴를 격는다. 유교개혁운동도 있었지만 조선 소멸의 원인을 유교에서 찾는 시선도 생기면서 부정적 인식이 강해졌다. 그러면서 종교학적 유교는 세력을 거의 잃었지만 일상생활의 윤리규범이나 양식은 유교적 가치에 기반하고 있다.

 

 

일본

백제의 오경박사(五経博士)가 513년에 전파.

15세기 가마쿠라 막부에 주자학(성리학의 일부)이 전파되었으나 오닌의난으로 교토가 황폐화되면서 유학자들이 지방에 퍼지며 적지않은 승려들도 유교를 연구했다.

 

16세기에는 유교 관련 인물로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가 있는데, 선승으로서 주자학을 배우다가 임진왜란 이후 잡혀온 조선의 유학자(퇴계파) 강과의 교류로 유학을 체계화했다.

 

17세기 에도막부에서 유교와 불교를 분리했고 유교의 양명학, 성리학을 독자발전시켜 중앙집권화에 사용했다. 다만 무사층만이 이를 연구하고 사용했기에 평민들은 연구자를 빼면 아는 이가 거의 없다고 한다.

 

때문에 현재 일본에도 종교적인 관념이 아닌 사상으로서의 흔적이 문화전반적으로 남아있다. 메이지유신 이후 유교사상이 충(忠) 강조되었는데, 이 부분이 '수신'등의 도덕 교과서에도 남아있다고 한다.

 

 

류큐

류큐왕국의 신토가 종교로서 기능을 했고, 유교가 국가이념으로 사용했다.

중국에서 유교가 전파된 시기는 17세기(1676) 보다 조금 이른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유학 교육기관인 명륜당을 설치해 중국어와 유교경서를 교육했다. 유교는 민간에도 널리 퍼졌고 상류층은 중국으로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베트남

한족을 통해 유교(Nho giáo, 뇨자오)가 들어온 시기는 11세기보다도 전이지만 본격적으로 국정 이데올로기로 사용된 시기는 호 왕조(1400~1407년) 시기이다. 하지만 이때는 조선의 숭유억불과 유사한 용도로만 사용되었고 사상을 많이 곡해했다. 이후 명나라 침공과 격퇴가 벌어지면서 후레왕조 시기(1428~1788년)에 유교사상이 재정비되고 전파가 가속화되었다. 

 

베트남도 명나라와 지리적으로 가까웠으나 조선의 유교와 당연히 달랐다. 학파의 구분이 옅었으며 개방적이고 현실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때문에 상황에 맞게 여성의 재산권과 이혼권을 인정하는 부분도 있었다.

 

베트남이 프랑스에 식민지화 되었을 때 유생들 중 일부는 복벽주의 세력으로 독립운동 활동을 했다.

 

 

 

참고: 나무위키. 유교. 타이완섬. 후지와라 세이카. 류큐 왕국. 복벽주의.

참고: 위키백과. 藤原惺窩.

참고: 우리역사넷. 성리학의 발달.

참고: 행성B. 공자 VS 맹자 VS 순자 VS 주희, 차이를 아시나요?. 행성B 블로그.

참고: 한재훈(2020). 한국과 베트남의 유교 수용과 예교 시행 비교. 한국학중앙연구원. DBpia.

참고: 관리자(2016). 대학자 퇴계 이황 성리학 논쟁에 불을 지피다. 여강이씨향단파.